![]() ![]() [곽노은 여행전문 통신원과 떠나는 유럽] 헤이그에 서려있는 애국의 혼…네덜란드 여행기 이준 열사 기념관[워싱턴 중앙일보] 이준 열사 숨진 드용 호텔이 지금의 기념관 기사입력: 05.03.12 18:43 사진 1. 이준 열사 기념관은 3층짜리 작은 건물이다. 2. 이준 열사의 흉상 앞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송창주 관장. 3. 이준 열사가 머물렀던 호텔방과 그의 복제된 유품들. 4.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고 말씀하는, 이준 열사의 유훈. 1978년에 발간된 네덜란드 연감에는 ‘1907년 헤이그에서 한 한국인의 비극’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 한국인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무효와 국권 회복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이다. 그 분이 바로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이다.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올라 가는 나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100년 전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헤이그로 오셨던 만인의 영웅. 그는 꺼져가는 대한제국의 정의를 살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두 분과 함께 고군분투하셨지만, 슬프게도 대쪽 같은 그의 의지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꺽이고 만다. “독일과 벨기에 등지에서 교포들이 찾아와 위대한 선열의 역사를 보고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이기항선생과 송창주 관장 부부. 지난 16년 동안 이준 열사 기념관을 세우고 지켜온 분들이다. 이기항 선생(75세)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주재원으로 네덜란드에 왔다 암스테르담에 눌러 앉은 사업가. 아내인 송창주 관장(72세)은 이화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원 가정학과를 졸업했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들은 이준 열사에 대한 송창주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장군을 포함한 군인들은 흐트러지지 않는 차렷 자세로, 민족사관고등학교 등 젊은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감정이 복 바쳐 오른 사람은 무릎 꿇고 묵묵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1905년 7월 29일 일본에서 가쓰라-태프트(Taft-Katsura Agreement) 밀약이 맺어졌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한국을 차지한다는 강대국간의 비밀협정이다. 한국에 대한 국제적 지배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바로 을사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궁궐 내외에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가 감돈다. 이토는 모든 대신들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 했다. 결국 다섯 명의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한다. 곧이어 일본은 통감부와 이사청을 두어 한국의 모든 내정을 장악했다. 이에 영국 서리공사 이한응은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임지에서 음독자결했다. 민영환도 2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한다. 이들외에도 특진관 조병세, 법부주사 송병찬, 전 참정 홍만식, 참찬 이상상, 학부주사 이상철 등이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했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부사 이위종을 평화화의 특사로 내락하고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을 내려 주었다. 고종황제의 밀명을 품고 서울을 떠난 이준 열사는 이상설, 이위종 특사와 함께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르렀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조차 할 수 없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자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할 호소문을 만들었다. 호소문에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것으로, 국제법상 무효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907년 6월 30일 평화회의보는 대한제국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평화회의보는 영국의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가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윌리엄 스테드는1907년 7월5일, 이위종과의 인터뷰 기사를 싣고 기자협회 연설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활동 20일 후인 1907년 7월 14일. 드용 호텔(현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이준 열사는 분사하신다. 이준 열사의 죽음은 홧병에 의한 분사설, 감염설(일본 정보문서 기록), 또는 자살설과 독살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준 열사 순국 이 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켰다. 그리고는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함께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 7개항을 내용으로 한 정미7조약(일명 한일 신협약)을 체결한다. 일본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상설 특사에게는 사형, 이준 열사와 이위종 참서관에게는 종신징역형을 선고한다. 이후 통감부에 의한 차관정치가 시행되었고 4년 후인 1910년 한일 강제합병으로 대한제국의 국체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토 히로부미는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대한의군 참모중장)에 의해 사살됐다. 여행팁: 입장료 5유로, 주중에만 문을 연다. |